티무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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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칸 왕조'''
'''گورکانیان'''

''Gūrkāniy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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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1370년 ~ 1507년
위치
서 아시아+중앙 아시아 일부
수도
사마르칸트(1370~1405)
헤라트(1405~1507)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아미르
주요 군주
티무르(1370~1405)
샤 루흐(1405~1447)
울루그 베그(1447~1449)
언어
페르시아어, 차가타이어
종교
하나피 수니파
종족
차가타이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우즈베크인
통화
디나르
주요 사건
1326년 티무르 활동 시작
1370년 티무르 제국 건국
1402년 앙카라 전투
1505년 사마르칸트 함락
1507년 멸망
성립 이전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멸망 이후
무굴 제국, 모굴리스탄 칸국, 흑양 왕조, 백양 왕조, 히바 칸국
1. 개요
2. 역사
2.1. 티무르 시대
2.2. 샤 루흐 시대
2.3. 혼란의 시대와 우즈벡의 침략
2.4. 북인도에서 새로운 시작
3. 문화
4. 창작물에서
5. 역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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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크-몽골계통의 티무르가 건국하여 1370년에서 1526년까지 존재했던 서아시아 · 중앙아시아이슬람 제국. 다만 건국자인 티무르 당대에만 통일된 제국이었을뿐 티무르 사후엔 마치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처럼 유목민족의 분할상속제도에 따라 여러 아들들과 손자들에 의해 분할되어 티무르의 후손들에 의해 통치된 이란중앙아시아 일대에 동시에 난립한 여러 티무르계열 국가들의 총칭에 가깝다. 티무르 당대에 수도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였다.

2. 역사



2.1. 티무르 시대


차가타이 칸국 출신이며 동시에 아버지가 중앙아시아튀르크인이고 어머니가 칭기즈 칸의 후예인 티무르몽골 제국이슬람 제국의 동시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세운 국가로, 잘나가던 시절에는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산맥 지역을 아우르던 대국이었다. 그 당시 면적이 비슷한 나라는 명나라말고는 없었다. 티무르가 정복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약무기의 사용과 중앙아시아 여타 세력들의 쇠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티무르 본인의 군사적 재능도 한 몫했다. 이 나라는 엄연히 튀르크계였고, 티무르 본인도 튀르크계 부계혈통을 두었으나 모계가 몽골 황금씨족의 후예인지라 몽골제국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몽골제국의 본진인 중국을 되찾아 이슬람화 하고자 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1369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튀르크계 유목집단들을 통합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1370년부터 1405년까지 계속된 티무르의 원정에 의해 영토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초기 10년가량은 동부의 모굴 칸국, 서부의 호레즘, 북부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모굴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스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모굴 원정을 감행하여 성공리에 마무리했다.[1] 이어 1372년부터 1373년까지는 호레즘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때 주치 울루스 좌익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톡타미쉬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레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었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샤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어 서부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라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주치 울루스의 군주가 된 톡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등지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고, 1395년 사라이를 파괴했다.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2]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를 몰아내고 알레포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드로 귀환했다.
이렇듯 티무르 시절 몽골-튀르크계통의 차가다이 울루스(차가타이 칸국)과 훌레구 울루스(일 칸국),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갈아버렸으며, 중동-인도지역의 여러 이슬람 세력도 줄줄히 갈려나갔다. 게다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잘나가던 오스만 제국마저도 앙카라 지역에서 시원하게 갈렸다. 이를 통해 중동지역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며, 이후 명조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도중에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티무르가 병사하는 바람에 명나라 원정은 무산되었다. 만약 명나라와 전쟁을 했다면 어땠을지 상당히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2.2. 샤 루흐 시대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에 왕위상속을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티무르가 사망할 때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멀리 떨어진 발흐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피살되고, 뒤이어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서투르키스탄에 국한되었고, 중부 이란의 이스파한과 쉬라즈 등지는 티무르의 둘째아들 우마르 셰이흐의 자식들이 지배했다. 그런가 하면 제국의 가장 서북부에 해당되는 서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멘 계통의 유목부족들, 즉 잘라이르 왕조와 백양 왕조(악크 코윤루),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등이 독립해 있었다.
이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 했으나, 이후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고, 중부 이란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타브리즈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샤 루흐는 1421~34년 세 차례 원정을 통해 그를 패배시켰다.[3] 샤 루흐는 동쪽의 모굴 칸국에도 군사적 압력을 가해 1425년에는 아들 울룩 벡을 보내 원정을 감행했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여 몇 차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맞이하고 했다. 1413년 샤 루흐의 사절단은 북경을 방문하였고 이들이 귀환할 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西域行程記)』와 『서역번국지(西域蕃國志)』라는 글을 남겼다. 1419~1421년에도 샤 루흐와 그의 아들 바이숭쿠르가 보낸 사신단이 명에 다녀갔는데, 이때 사신이었던 기야스 앗 딘 나카시는 당시 영락제와 화재를 입은 자금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4]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쳐주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다만 샤 루흐 시대에도 티무르 사후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장 문서상 티무르 제국의 영토인데도 흑양 왕조, 백양 왕조가 흥기하여 서부 이란에서 쫓겨나는 등 샤 루흐의 명령이 서지 않는 지방도 적게나마 있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샤 루흐는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제국의 분열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1447년에 손자 무함마드가 페르시아 서부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했다.

2.3. 혼란의 시대와 우즈벡의 침략


그리고 샤 루흐의 장자인 울룩 벡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울룩 벡은 아버지 샤 루흐의 치세 때 사마르칸트를 분봉받아 40년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다스렸으며, 과학이나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천문대를 짓고 여러 학자나 예술가를 초빙하여 그들의 활동을 장려했고 울룩 벡 본인도 빼어난 천문학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학자이기도 했다.[5] 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경향은 그대로 물려받고 나라도 잘 다스리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고, 즉위 2년만인 1449년에 부친의 정치가 이슬람교를 따르지 않고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아들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참수시킨 아들 압달 라티프는 제위한지 고작 6달 만에 똑같이 반란을 당해 겨우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되고 만다. 그 후 여러 지방세력가들이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놓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제국의 서부는 이 혼란기를 틈탄 흑양 왕조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백양 왕조에게 차례차례 뜯겨나갔다.
1451년에 즉위한 아부 사이드[6]는 1457년 호라산을 평정하고 헤라트에 입성하여 중앙아시아와 동부 이란을 석권했다. 그는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문율을 깨고 스스로 을 칭했다. 그러나 그는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을 정벌하러 갔다가 1469년 오히려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부 사이드 사후 그의 영역은 여러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이 가운데 안디잔과 페르가나를 차지한 우마르 셰이흐가 1494년 사망하자 12살밖에 안 된 그의 아들 바부르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신흥세력 우즈벡의 샤이바니 칸이 1500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점령했다. 1503년 여름 바부르는 모굴 칸국의 마흐무드와 아흐마드 두 칸과 연합하여 샤이바니와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를 당하고 두 칸은 포로가 되었다. 1504년 바부르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아프간의 쿤두즈와 카불을 점령하고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샤이바니는 1504년 호레즘까지 장악하여 서투르키스탄을 완전히 정복했고 이어 티무르 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헤라트발흐까지 점령했다.
우즈베크인들은 원래 주치의 후손들이 튀르크 원주민과 뒤섞이고 여기에 사마르칸트 내 페르시아 백인종까지 뒤섞여 페르시아화되었던 사람들로 당시 문화적으로 꽃피어있던 티무르 제국의 학술적, 문화적 자원을 그대로 흡수해서 티무르의 후손들을 쫓아냈으면서 현재는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는 판이다. 그리고 원래 주치에게서 유래했으나 현재 우즈벡어는 주치의 후손들이 쓰는 킵차크계 튀르크어가 아닌 위구르와 같은 차가타이계 튀르크어이다.

2.4. 북인도에서 새로운 시작


우즈베크인들의 침입기에 속된 말로 개털린 티무르 제국의 왕족들 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바부르인데, 그가 이후 중앙아시아를 떠나 인도지역을 털고 그 자리에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의 후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떠나 아프간과 인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무굴조를 티무르조랑 동일시하는 역사적 시선도 있다.
이후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옛 영토에 다시 복귀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가끔은 사마르칸트도 점령하는 등 중앙아시아로 돌아오나 했지만...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우즈벡의 샤이바니 칸이 이란의 신흥 세력인 시아파 사파비 왕조의 군주 샤 이스마일과 벌인 메르브 전투에서 패사하자, 바부르는 샤 이스마일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 지배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사마르칸트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는데, 바부르가 시아파 군인들을 데려와[7] 큰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향을 떠난 바부르는 1525년 라호르를 점령하고 이듬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북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의 토대를 놓았다. 이렇게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오스만, 사파비, 무굴, 우즈벡이 흥기하여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이들 모두가 튀르크계가 주인이거나 적극 참여한 튀르크 국가들로 사파비 왕조는 페르시아 백인종들이 건국했으나 키질바쉬(kizilbash)라는 튀르크멘 유목민 부대가 주력부대였고, 오스만 제국은 오우즈 부족이었으며,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티무르의 후손으로 원래 차가타이 칸국 계통의 튀르크인이었다.

3. 문화


울룩 벡의 주도로 사마르칸트, 부하라, 기즈다반 세 도시에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가 건립 되었으며,[8] 직경이 40미터에 이르는 원통형 천문대가 건설되었다.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37년 천문표를 만들고 이를 계속 수정하여 자신이 살해되던 해인 1449년에 최종 완성했다. 이 표는 당시 이슬람권은 물론 그 후 오랫동안 유럽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정확한 관측 결과를 담고 있었다. 또한 울룩 벡은 도서관을 세워 각 분야의 서적 1만 5000권을 수집했으며, 자신이 직접 『네 울루스의 역사』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티무르 왕조의 문화는 역설적이게도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15세기 후반 헤라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9년부터 1506년까지 반세기 가까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전쟁과 파괴의 혼란을 피해 많은 학자, 문인,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당대의 재상이자 차가다이 문학의 완성자인 알리 시르 나바이는 『파르하드와 시린』, 『레일리와 마즈눈』 등 많은 시집을 남겼다. 신비주의 시인으로 이름난 압둘 라흐만 자미는 낙쉬반디 교단의 장로인 호자 아흐라르의 전기를 집필했다. 바이카라의 조정에서는 하피지 아브루, 압둘 라자크 사마르칸디, 미르혼드, 혼데미르 등 수많은 역사가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이 남긴 역사서들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티무르 제국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훌레구 울루스(일 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라시드 앗 딘 등의 이란 역사, 기록, 문학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당대 최고 화가엿던 비흐자드, 서예가 마쉬하디 등도 이 시기를 빛낸 예술가들이다.

4. 창작물에서


토탈 워: 미디블2에선 기본적으론 플레이 불가능한 팩션으로 등장(올팩션 모드로 플레이 가능하고 커스텀 배틀에선 기본적으로 플레이 가능). 그야말로 악몽같은 기세로 유럽에 쳐들어온다. 특히 투르크로 플레이할 경우 제대로 직격탄을 맞게 되는 악몽의 존재. 몽골은 운좋으면 러시아에서 등장할 수도 있지만 티무르는 무조건 아나톨리아와 중동 지역을 공격한다.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4에서는 쇠퇴한 몽골계 세력 대신 주인공 세력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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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닛 스킨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2티어 국가로 등장한다. v1.23 버전에서는 샤 루흐의 능력치가 고증에 맞게 상향, 정부 등급이 제국급으로 상승, 체제가 유목민에서 이크타로 바뀌며 봉건제가 수용되었고 티무르 본국의 영토는 헤라트 주변부를 제외한 곳은 트랜스옥시아나, 코라산, 아잠[이라키°아잠], 시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코어만 남은 채 분할되었다.
또 샤 루흐의 죽음으로 티무르 제국의 몰락이 서서히 진행되었던 고증을 재연, 첫 군주가 죽으면 독립열망을 낮춰주던 모디파이어 효과가 사라져 속국들의 독립열망이 치솟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분할된 속국들에게 티무르 제국의 코어가 남아있다.[9]
¤공략
시작과 함께 티무르는 굉장히 큰 난관에 부딪혀 있다. 본국의 국력 보다 속국들의 연합이 강하기 때문인데, 국력이 속국들에게 심하게 밀리므로 독립을 하겠다고 전쟁을 걸어오면 게임 진행이 힘들어진다. 첫 번째 군주인 샤 루흐가 강력한 모디파이어[10]를 가지고 있어, 시작한 당장은 큰 위기가 없지만 군주의 나이가 60이 넘는 고령인데다 개복치급으로 잘 죽는다. 만약 죽게 된다면 이 모디파이어도 없어지므로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르는 판국이다. 다행히 샤 루흐의 죽음이 있기 전엔 속국들이 명령을 잘 따르므로 이 시기에 속국들의 힘을 잘 억누르고 본국에 합병시키도록 한다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속국들의 힘을 억누르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 속국의 병력을 줄이는 방법과 국가의 국력을 늘리는 것인데,이를 둘 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코어가 있는 바로 옆 아잠을 공격해 땅을 최대한 많이 빼앗아온다면 독립열망 관리가 그나마 수월해진다.명령을 따르는 속국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해 병력을 빠르게 소모하므로 본국에 병력을 최대한 늘리고 속국의 병력만 적진에 투입하기 놔둔다면 병력으로 인한 세력 차를 개선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속국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결혼을 진행하여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두면 독립의 대한 열망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상태를 10년 유지해서 차례로 속국들을 합병한다면, 주위에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없게 된다. 이후에는 미션트리를 따라 인도로 진출하여 무굴 제국으로 변환하는 방법이 있다.
한편 트랜스옥시아나 등 티무르의 후예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은 특정 조건 하에 디시전으로 '티무르 제국의 유산을 주장', 국가를 티무르로 변환하고 클레임을 얻을 수 있다.[11] 티무르의 후예가 지배하지 않는 국가라면 특정 조건 하에 디시전으로 '티무르의 후예를 초청'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 있다.
1.28 패치 (황금세기DLC) 이후 가장 쉽게 티무르 속국들을 합병하는 방법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는게 좋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europa&no=724135&search_pos=-728199&s_type=search_all&s_keyword=skalclrptsp&page=3
대체역사물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서는 토목의 변 당시 조선군이 오이라트군을 격파하고 영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티무르 제국의 사신단을 구출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그들이 조선을 방문해 미당 독점 교역권을 따내고 조선이 사신으로 보낸 신숙주가 울루그 벡이 맏아들의 쿠데타로 밀려나는 것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면서 점점 관계가 깊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조선과 형제국이 되었고 다마스쿠스강 재련 기술과 새 가축종과 곡물종자를 전달해 주었으며 그 뒤로도 조선의 서역 원정에서 병력 1만과 대부분의 물자를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원정이 끝나면서 동유럽 연합에게 받은 배상금 절반을 배당받고 새 무역 창구도 열리는 등 대체역사의 최대 수혜국이 되고 있다. 외전에서는 울루그 벡의 정책으로 이슬람 법을 완화시켜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도를 낮추어 외부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후신으로 인식될 정도로 번영 중이라고 언급되며 현대 시점에 와서도 파르스 이슬람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에서 티무르 제국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 문명은 타타르.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와의 싸움인 앙카라 전투까지 다루고 있다.

5. 역사보기 틀
















[1] 이 시기는 몽골제국이 멸망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이므로 "칸"은 반드시 칭기스 칸의 직계 후예인 황금씨족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인식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었다. 티무르 역시 그의 세력을 바탕으로 칸을 칭하고 싶었으나, 황금씨족이 아니었기에 그의 호칭은 아미르(amir)나 부마(gurgen)에 머물렀다. 실제로 오이라트에센 타이시는 토목의 변 전후로 칸을 칭했으나, 예하 부족들이 반발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2] 인도는 우상의 나라이자 재화의 나라였다. 이슬람에서 경멸하는 우상 숭배의 나라였기에 이를 빌미로 '성전'을 표방하여 쳐들어 간 다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른바 '티무르식 성전'[3] 그러나 샤 루흐가 사망한 뒤 흑양 왕조의 세력은 다시 커져 1450년대에는 이스파한, 쉬라즈, 키르만 등을 모두 점거했다. 이들은 1460년대 후반 백양부 우준 하산의 공격으로 무너졌지만, 서부 이란은 여전히 티무르 왕조의 통제밖에 있었다.[4] 사신이 방문했을 때 막 지어진 자금성에 벼락이 내리쳐 궁궐이 불탔는데, 이를 보며 영락제가 "하늘이시여, 제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리도 가혹하게 구십니까!"라고 하늘에 울부짖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5] 어느 정도냐면 세월이 흘러 그에 대하여 알게된 서구권 백인 천문학자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지동설로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거리를 측정하였고 온갖 천문학 및 수학연구에 대해서도 당대 유럽에서도 천재로 통할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이러한 게 드러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는 달에 난 화산 분출구를 발견하자 울룩 벡이라고 이름을 지어 그를 기렸을 정도다.[6]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샤의 손자[7] 악바르 대제 초기에 권신이었던 장군 바이람 칸도 시아파였다.[8] 특히 1417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하라의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 건축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이라키°아잠]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서부를 부르는 이름으로, 1447년 샤 루흐의 손자 무함마드 빈 바이순코르가 이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할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도중 할아버지가 병사해 위기를 넘겼다. 무함마드는 형 아불 카짐 바부르와 엎치락뒤치락 싸웠으나 1451년 형에게 생포된 후 처형, 그의 땅은 이 와중 쳐들어온 흑양 왕조에게 정복당했다.[9] 일단 상속을 위한 내전에 가까운 형식의 분열이므로 전쟁을 통한 상속을 표현하기 위해 코어가 있는 듯.[10] 독립 열망 -50%[11] 티무르 제국의 최전성기 영토인 동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차가타이, 노가이 일부, 티무르와 티무르 속국 아잠에 영구클레임을 박아주니 꼭 형성하자.